대한민국 백묘화 전수자 '일필백호' 화백

입력시간 : 2019-02-20 13:48:32 , 최종수정 : 2019-02-20 13:48:32, 한익희 기자

[한국경제뉴스=한익희기자] ‘일제가 지워버린 수묵 백묘화, 한지 위 칼로 오리듯 먹선으로 한 치의 실수나 수정 없이 단숨에 그려내는 경이로운 근원의 미술’

 

전통적으로 동양의 수묵화란 채색을 기하지 않고 먹만을 사용해 그린 그림을 말하는 것으로, 서양화와의 차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수묵화란 먹의 농담과 붓의 억양으로 대상을 표현하면서, 오로지 묵선만을 사용한 백묘화(백화)와 대치점에 놓인 그림 기법이다.


수묵화에 묵화, 담채화, 채색화의 구분이 있어도 백화에는 오로지 백화 밖에 없다. 다시말해 백묘에는 오로지 화선지 위를 단 한 번 지나는 날카로운 선만이 있을 뿐, 수묵화처럼 먹의 농담으로 표현하는 ‘파묵’과 아예 윤곽선 자체를 쓰지 않고 수묵의 퍼져나감만으로 표현하는 ‘발묵’ 등의 이른바 기교가 전혀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백묘를 “한숨 붓에 글씨나 그림이 줄기차게 뻗어나감”을 뜻하는 ‘일필휘지’라 하는 이유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회화 또한 다름 아닌 기원전 전국시대의 백묘화이다.
 
처음부터 색채나 음영을 가하지 않고 오로지 먹선의 강약·억양·굵기만으로 모든 표현을 완성해 내야 했기에, 마치 선승의 일갈처럼 선 하나로 대상의 정곡을 찔러야 했다. 무엇보다 분묘(밑그림)나 일체의 선염(붓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수묵이나 채색으로 표현효과를 다양화 한 기법)이 없기에, 한 번의 흐트러짐이 그대로 끝인 것이다.


무사도에 있어서나 백묘에 있어서나 단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지 않는다. 당나라의 백화가 오도자가 화성(畫聖)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백호화백의 백묘화 팔마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도 먼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세련된 백화의 기법이 유행했고, 조선시대에 중국 산수화풍의 유행으로 맥이 끊겼던 것을 후에 정조가 김홍도로 하여금 부활케 했다.

붓선이 보이지 않는 담채나 산수에 비해 워낙에 일필백묘가 어렵고 헤아릴 수 없이 정묘하기에, 조선 말을 끝으로 일제시대와 식민사학을 거쳐 우리의 민족화계에서 그 맥이 완전히 끊겨버린 것을, 현대에 와 이를 놀랍도록 계승해 낸 화백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일필백묘의 묘미를 그대로 따라 자신의 호 또한 일필백호라 한 백호 화백은 백묘화를 이렇게 말한다. “천년 한지는 먹을 대는 순간 그대로 번져버린다. 칼로 오리듯 먹선을 예리하게 심어 넣으며, 밑그림 하나 없이 날것 그대로 그려내는 고난도의 화법이 바로 백묘다.” 얼마나 정교하면, 백호 화백은 백묘화에 대해 선과 그림을 심어 넣는다는 표현을 할 정도다.
 
화성 오도자조차 백묘의 난해함에 인물화는 몇 남기지 않았고, 그마저도 초상화가 아닌 전신 인물화일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 백호 화백은 3․1만세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 100주년 기념 여성항일애국지사 170인 백묘화전을 일구어냈다.

170인 전원을 오로지 백묘화로, 그것도 얼굴만 근접한 초상이다. 실제 인물을 앞에 둔 것이 아닌 흐릿한 증명사진을 보고 표현해 낸 것이기에 세상이 깜짝 놀랐다. 심지어 그는 단원 김원도의 풍속화를 모사나 분묘 없이 백묘로 그대로 모작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한지 위에 한 치의 실수나 수정 없이 단숨에 그려내야 하는 경이로운 선묘, 밑그림과 묵화 채색을 반복하면서 지우고 그리고 덧칠하고 다시 지우고 그리고 하는 그 어떤 동서양의 화법과도 비교조차 불가능한 근원의 미술인 것이다.

얼마 전 우리 한민족의 시원이 서린 키르기스스탄 톈산을 방문하고 돌아온 백호 화백은 더욱 열정으로 넘쳤다. 천손민족의 위대한 문화예술을 만방에 자랑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백호화백은 오늘도 일필백묘의 길을 묵묵히 걸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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